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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폭력배 동대문파 회장 이정재의 일화

by Occult.s 2020. 6. 8.

이정재는 경기도 이천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고 서울 신흥대학(新興大學, 경희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다 당시 교육수준으로 나름 고학력자였다
특히나 고향인 이천에서 씨름대회를 개최하면 그날 상품인 소를 모두 가져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정재

 

이후 처가살이로 동대문에서 광목 장사를 했으나 어떤 깡패와 시비가 붙었고 그 깡패를 씨름 기술로 제압한 계기로 김두한의 부하로 있다가 친구로 되었다
그러고 근로보국대인 김두한의 반도의용정신대 서기를 보다가 김두한의 추천으로 경찰특채가 되어 경찰이 되었다 해방 이 후 고향 후배인 곽영주를 수도경찰학교에 입교시켜 경찰에 합격할수 있도록 이래저래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정재는 좌익들과 수없이 싸우고 제주 4.3 사건에도 참여를 했었다

 

이를 눈여겨본 조열승, 임화수, 김기홍은 싸움실력에 흠모해 이정재와 친근을 맺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반민특위의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 6월 6일, 장경근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체당했다
당시 이정재에게 체호당했던 노덕술은 풀러나게 되고 이에 보복으로 이정재를 죽일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죽기 진적 이승만의 지시로 반민특위 형사들이 풀러나게 된다

 

이날로 이정재는 정치 사회에 괴리감을 느끼게 되고 경찰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동대문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하다가 6.25 전쟁이 일어났는데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버티게 되지만 과거 경찰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생사의 위기에 처했는데 김기홍이 공산군으로 위장하여 이정재를 빼와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이정재 사단

 

이 일로 이정재와 김기홍은 처남 매제 지간이 되고 부산으로 가게 됬는데 임화수의 부탁으로 새로운 조직 '가족회'라는
조직을 만들게 된다 이 것이 동대문 사단의 시작이였다

 

1953년에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만들고 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동대문 사단의 세력도는 회장 이정재, 부두목 조열승, 임화수 그 밑에 오영환, 고일심, 김양수, 차석환이 7인위원회 자리에 올랐으며 임화수가 주도하는 반공예술단, 서울시내 하부조직 10개판인 행동부에는 특수부대 이석재 외 몇명, 종로파 심종현 외 몇명, 소공동파 홍영철 외 몇명, 서대문파 최창수 외 몇명, 광화문파 장영빈 외 몇명 종로4가파 유지광,강승일 외 몇명, 경마장파 이창수외 몇명, 동대문 시장파 장세규 외 몇명, 평화극장파 이천일 외 몇명 청년도장파 이창수 외 몇명등 거대한 조직이였다

 

가운데 시라소니



이 무렵, 호형호제하던 주먹 황제였던 시라소니가 이정재에게 돈을 몇차례 빌리다가 살길이 막막한 부하들 이였던 전직 북파공작원 KLO 대원들에게 점포를 양도해줄것을 요구했고 마지막에는 50만환(현금 5억)을 요구하고 서북청년회를
위한 점포를 요구 했다

 

이에 못마땅하게 여겼던 동대문패의 김기홍 임화수 조열승 이석재 김사범 등은 분노 한다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시라소니를 좁은 곳으로 유인해 망치,낫,삽,칼,도끼,등으로 린치를 하게 된다
이른바 시라소니 린치 사건이다

 

이 시기 이정재는 자유당에 소속되있는 상태라서 이화룡 명동패와 싸움을 원치 않아 김기홍을 보내 화해를 시도 하지만
이석재는 후환을 없애겠다는 이유로 시라소니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 남은 한쪽 다리마저 부러뜨리려 했으나 방심을 틈탄 시라소니는 깁스로 이석재의 얼굴을 치고 시끄러워지자 이석재는 그대로 도망쳤다 그 소식을 들은 명동패는 동대문파와 전면전을 벌였다

한편, 자신의 조직 동대문파의 불만을 품고 오다가 제 삼세력 살해 지령서를 받고선 실망감과 혐오감을 느끼고 이정재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동대문파에 불만이 컸던 정양원과 시라소니의 복수를 원하는 KLO대원들을 불러 복수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김동진은 자유당에서 연락이 왔는데 급한 일이 있다고 이정재를 요정한식집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게 된다
요정한식집에 도착한 이정재는 휴업이라 직원이 없었다 그때 정양원과 KLO대원들이 나타나 심한 구타를 당하게 된 이정재는 중상을 입게 된다

 

김동진의 배신에 분노했고 정양원, KLO부대를 제거하자고 동대문파 간부들이 제의했으나 이정재는 거절했다 자신을 죽이지 않았기에 이 일을 덛어두기로 하고 배신자 김동진만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김동진은 제 삼세력 살해 계획 지령을 언론에 폭로하고는 잠적하게 된다

이후 김동진을 어떻게든 나타나게 할려고 임화수는 서부 영화 OK 목장의 결투를 급하게 개봉을 하게 되는데 그 미끼에 걸려든 김동진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나타나게 된다 부하 독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동진은 단성사에 영화를 보러가게 된것이다

 

권상사가 노리고 있었지만 사람을 한번도 쏴본적이 없어서 실패를 하고 대신 이석재가 사람들 앞에서 김동진은 저격하게 된다 이른바 단성사 저격 사건으로 불린다
이석재의 총을 맞고 쓰러진 김동진은 병원에 입원을 했고 생명에 지장이 없어 회복후에 퇴원을 하고 조폭계를 떠나게 된다
한편 이석재는 자유당의 정치적 압력으로 풀러나게 된다

왼쪽 곽영주

그리고 곽영주는 이정재가 경찰에서 건네준 많은 뇌물로 경사로 임관하게 되고 곽영주는 이승만의 눈에 띄어 경호를 담당하면서 부터 이승만의 측근이 된다
이정재는 자유당 이기붕의 권력과 이승만의 측근이 된 곽영주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그의 야망은 국회의원의 꿈을 가졌고 고향인 이천에 민의원 출마를 계획한다 하지만 이기붕에게 이천 지역구를 빼앗기게 된다
그러다가 이기붕과의 마찰을 빚게 되고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사게 되고 이정재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김기홍은 1954년 자유당이 무너져 가는 상황이었고 이기붕이 제안했던 사사오입 개헌 개입과 정치권력 제안과 모종의 일로 인해 조직이 기울여지자 자유당은 무너지고 영원한 권력이 없는 법이니 자유당과 결별하고 국회에 나가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이정재는 이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김기홍은 동대문 사단을 떠나게 된다

 

임화수


이후 이정재는 북악산 족에 주택을 지어 은둔생활을 하게 되고 임화수는 동대문파의 1인자로 올라가게 된다 4·19 혁명 후인 1960년 4월 28일에 검찰에 자진출두하여 정치테러의 원흉으로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으며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이 들어서고 다시 체포되었으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고 1961년 2월 10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5·16 군사 정변으로 다시 정변세력에게 체포되었다

 

시라소니는 이정재의 린치사건을 부인했고 이화룡,김두한도 이정재를 구하려고 힘을 썼다

 

 

정치테러 부정선거 고대생습격사건 등으로 군법회의에서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곽영주, 최인규, 신정식 등을 사형을 선고 받게 된다


이정재는 죽기전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 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 말을 남기고 서울형무소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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