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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 684부대의 진실

by Occult.s 2020. 4. 15.

실미도 사건(實尾島事件)은 1971년 8월 23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무의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공군 북파공작 부대의 부대원들이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빠져나와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진입한 뒤 군(軍)과 총격전을 벌이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한 사건이다

 

실제 실미도 훈련병들



684부대가 창설된 이유는 1968년 1월 21일, 소위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1.21사태가 일어났었다 이 사건은 북한이 무장한 군인을 남한에 보내 전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 이 사실에 분노하여 보복을 목적으로 같은 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 따라 실미도에 비밀리에 684부대가 창설되었다

 



무장공비와 같은 인원인 총원 31명으로 창설된 684부대원 혹독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3년 4개월동안의 훈련이 이루어졌다 이 훈련 과정에서 7명의 훈련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심장마비,섬 탈출,명령 불복종,근처 민가 강간 자살한 인원들이다

평양에 침투해 김일성 목을 따오는 목적으로 실전명령만 기다리며 3개월을 기다렸지만 작전명령은 떨어지지 않았고 지옥 같은 훈련을 3년이나 더 받았다 보급과 지원이 예전 같지 않았지만 침투명령만 기다렸는데 그 사이 중앙정보부장이 바뀌었고 남북 대치국면도 화해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실제 실미도 교관들

 

어느덧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 가치가 사라졌고 김일성 암살계획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잊혀지게 된다 소대장 김방일 공군중사 1명 외에는 특수전 출신 교관 및 조교들이 대부분 떠나고 이쪽과 별 관계없는 기간원들이 들어오는 등 상황이 나빠지자 이들은 점차 불안해져갔다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실미도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31명중 살아남은 24명의 훈련병들이 불만을 품고 일어섰다 교육대장 외 교관, 기간병 등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해 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인간병기로 만들어진 훈련병들 앞에서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당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특수부대원 1명도 사살되었다

이어 23명의 훈련병들은 외딴 섬 실미도를 빠져나와 12시 20분경 인천 옥련동에 상륙하여 인천 시내버스를 탈취한 뒤
청화대로 향했다

 



그러던 중 육군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실미도 훈련병 2명이 사살되고 말았다 버스 타이어가 터져서 더 이상 이동 할수 없게 되자 다시 시외버스를 탈튀하여 청와대로 향했다
14시 15분경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멈춰서게 된다 육군 포위망에 포위되어 가로수를 박고 버스가 정지했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이 벌어졌고 끝내 실미도 훈련병들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하였다

 

15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6명은 살아남아 체포됐으나 병원에서 2명이 죽고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은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실미도 684부대의 진상을 은폐하여 30여 년간 묻혀졌다 2003년 말 같은 이름의 영화가 개봉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는 실미도 훈련병들이 사형수,조폭 등 범죄자로 설정이 되어 있지만 실미도 훈련병 유족에 따르면 이들은 높은 보수를 준다는 정보기관원들의 거짓말에 속은 평범한 시민들이였다고 한다 범죄자 출신의 부대원은 없었고 시골의 농민이나 일용직 노동자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684 부대 창설 멤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방일 소대장은 이후로도 공군에서 계속 복무했으며, 준위까지 진급하고 1990년 퇴역했다. 이후 유일기업의 대표로 살다가 684 부대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영화 실미도도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에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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