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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정리 결말

by Occult.s 2020. 4. 5.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1991년 대구 달서구에 살던 다섯 명의 초등학생들이 도룡뇽 알을 주우러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이다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도 불린다 이 날은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하여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시·군·구의회 의원 선거일로 임시 공휴일이었다

 



사건 발생은 1991년 3월 26일 임시 공휴일이었다 아침 8시 대구 성서국민학교에 다니던 우철원,조호연,김영규,박찬인,김종식 그리고 김태룡등 초등학생 6명이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후 조 군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럽다며 나가서 놀라고 했고 김태룡을 제외한 5명의 아이들은 와룡산으로 출발했다 김태룡은 아침밥을 먹고 뒤늦게 친구들을 쫓아 갔지만 산에 가면 위험하다는 부모님의 말이 생각나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철원,조호연,김영규,박찬인,김종식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들고선 근처 와룡산으로 가고 실종되고 말았다

이 아이들이 실종되기전 여러 목격자들이 있었다

조호연의 형 조무연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을 듣고 헤어졌다

파출부 일을 하는 김순남 아주머니는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치고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에 가는 5명의 아이들을 목격했다

같은 학교 4학년에 다니던 함승훈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산 위쪽에서 10초 간격으로 비명소리를 2차례 들었다 친형과 와룡산 중턱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형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김종군의 어머니와 김영규의 어머니는 함승훈이 비명을 들었다는 시간에 똑같이 가슴이 오그라드는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부모들은 저녁 18시부터 와룡산 주변을 돌아봤지만 찾지 못했고 8시쯤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과 부모들이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수색했지만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사건 초기 경찰은 근거도 없이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한거라고 수사 방향을 잡는 바람에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갔다 이 부분에서 본격적인 수사가 늦춰졌다
그러다가 이 사건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모든 경찰과 군인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과 전국을 수색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해보자 만화,비디오,초코파이,전화카드 등 다섯 명의 아이들의 사진 광고가 인쇄되었다

 



2002년 9월 26일 오우근 씨에 의해 5명의 아이들을 찾게 되었지만 유골로 발견 되었다 발견된 곳은 구 육군 50사단 사격장 부지로 50사단은 1994년에 북구로 이전한 상태였다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워 탄피가 많이 발견되어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줍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라갔다는 제보도 있었기 때문에 오발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조난당했을거라고 추측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집 근처 동네 뒷산이였고 밤이 되면 그때나 지금이나 주변 마을 불빛이 환했다고 한다

 



부검 결과 맏형인 우철원 두개골에 찍힌 상흔만 무려 25군데였다 범인에게 저항하다가 본보기로 크게 희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철원,김종식,김영규 모두 좌측 두개골에 나타난 상흔들로 보아 흉기로 강하게 내려쳤다 그리고 박찬인,조호연은 외상 흔적이 보이지 않았는데 가장 마지막에 남아서 교살당한것으로 추측했다

범인은 1명이였을까? 2명이상 이였을까? 혼자였다면 한두 명이 떨어져서 놀던 때를 노려 순차적으로 살해했을 거라고 했다 범행도구는 날카로운 칼이나 망치였다

11년이 지나고 발견된 아이들의 유골이 가장 이해할수 없는 점이다 사건발생 초기 경찰과 부모들이 와룡산 주변을 샅샅이 뒤졌고 이어 수많은 군인과 경찰들이 수색했지만 아이들을 찾지 못했고 11년이 지나서야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사건이 커지자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잠잠해진뒤 다시 와룡산에 와서 암매장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실종자 김종식 군 아버지가 토막 살해했다는 경찰 수사에 김종식 군의 아버지는 유력한 용의자가 되었고 집 마당과 화장실,구들장까지 파냈고 집안 곳곳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유골 발견 현장에서는 탄두와 실탄 등이 같이 발견되었다 유탄에 맞아 사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었다 1994년 말까지 유골 발견 현장 근처에는 군 사격장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실종된 날은 임시 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사격훈련은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군에서 장부상 탄환 수량을 맞추기 위해 남은 탄환을 사격장에 임의 발사해 소진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유골이 발견된 직후인 9월 30일, 당시 구두닦이 한아무개 씨는 “지난 7월 30일 35살의 남자 1명이 구두를 닦으서 ‘군 생활 당시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했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경찰에 제보했다
미상으로 밝혀진 상흔이 총격으로 인한 관통상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이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야산 불량배 살인설도 있다 와룡산이 당시 우범지대였다는 것이다 한 제보자에 의하면 와룡산은 불량한 사람들이 많다 술취한 고등학생이나 20대 초반의 형들이 자주 싸우는 것을 목격했고 은밀한 행각도 많이 보아왔었기 때문에 이 불량한 사람들로 인해 피살당했다는 주장이다

난 대구시 서구에 위치한 서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중학교는 당시 50사단(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 과 그리 멀지 않은 죽전중학교를 졸업했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닐 때와는 약간의 세월 차는 있다. 난 30대 초반으로써 1984년 중학교에 입학했다.[17] — 하지만, 나도 중학교 때까지 와룡산 사격장으로 탄피와 더불어 유탄을 주우러 다닌 경험이 있다. 군부대 관계자들은 부인하겠지만, 당시 근처(서구 평리동 일대까지)의 초, 중학생들 중 탄피와 유탄을 주우러 다녀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다 알 것이다. 예비군 사격훈련장까지도 들어갈 수가 있었다. 거기서 탄피를 주워 오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장담한다. 당시 꽤 먼 거리에 총 쏘는 곳이 있고, 총알이 박히는 쪽에는 모래주머니와 더불어 흙으로 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참고로 나는 생계곤란으로 방위병 훈련소집 면제되었다. 태어나서 아직까지 실제 총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그야말로 당시의 기억대로이다.) 모아서 팔기도 하고, 목걸이나 기타 장식품을 만들기도 했으며, 자랑삼아 필통에 넣어 다니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에는 이곡동(당시 50사단 근처)에 친구네 집이 있어서 자주 놀러가서 산새들과 토끼 등을 잡겠다고 와룡산에 많이 올랐었다. 지금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 민가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았던 곳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민가의 불빛이 보였고, 오솔길도 아래쪽으로 나 있던 곳으로 기억한다. 나도 그 근처까지, 아니, 더 위쪽으로도 자주 놀러 가봤고, 해가 지면 내려오곤 했었다. 내 기억과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소년들이 당시 날이 추워서 저체온증에 시달릴 정도로 추웠다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근처에 살지 않는 나도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와룡산에 갔을 때, 해가 지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오곤 했었는데, 하물며 인근에 살면서 와룡산에 자주 오르락거렸던 소년들이 내려오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난 그 소년들이 다른 곳에서 피살되어서 옮겨졌다기보다는, 그곳에서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물론 내 경험에 비추어봐서 추론해 본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도 어릴 때 와룡산에 자주 오르곤 했다. 그러나 늘 재미나는 산행(놀이)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정말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와룡산은 그리 높지 않은 야산 형태이면서 깊숙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숲이 형성되기 때문에, 불량한 이들이 꽤 많이 있었다. 어릴 적 당시에 술에 취한 고등학생이나, 20대 초반 정도의 형들이 싸우는 것도 자주 목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은밀한 행각도 많이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씩은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곤 했었다. 술에 취한 채 담배를 물고 나타나서는 우리가 주워 놓은 탄피와 탄두를 모조리 뺏고, 때리기도 했으며, 엎드려 뻗쳐 등 심한 기합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에는 복싱을 시킨다며 우리 일행을 싸움을 붙이기도 했고, 나무에 묶어놓고 괴롭힘을 당한 적도 있었다. 난 그런 이들에 의한 살인이라 여겨진다. 물론 처음에는 죽일 의도가 없었겠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죽이게 되었고, 서둘러 암매장을 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아니면 묶어놓고, 또는 무릎을 꿇린 채 하체 부분을 흙으로 덮어놓고(실제로 어릴 때 이렇게 당해서 거의 초죽음이 된 적이 있었다), 괴롭히다가 가해자들이 그냥 내려가 버리는 바람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절대 자연사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5명이 전부 다쳐서 움직일 수 없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바로 아래 희미하게 민가의 불빛이 보일 것이고, 또한 근처에서 거주하던 아이들로서는 그렇게 모여서 자연사할(저체온증으로) 이유가 없다고 본다. 와룡산 일대는 소위 우범지대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 와룡산에서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기억이 생생하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허벅지에는 그때 와룡산에서 그들이 장난 삼아 괴롭히며 도루코칼(하얀색, 연필 깎는 칼)로 찌른 흉터가(채 1cm도 안 되는 길이지만) 남아 있다. 아마도 어릴 때 와룡산을 드나들어봤던 이들이라면, 현재의 경찰 발표나 수사 상황에 대해 어이없어하고 답답해하며 한숨 짓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디 조금 수고가 되더라도 정확한 사인 규명과 더불어 수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용의자는 꽤 오랫동안 와룡산에서 생활한 것은 물론, 11년 전 그 주변에 살았고,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공구를 다루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 전언이다

 

끝내 아이들의 사망 원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2006년 3월 25일 24시에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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