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트/사건사고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일대기

by Occult.s 2020. 7. 4.

안동 김씨 김두한은 1918년 5월 15일에 태어나 1972년 11월 21일 (54세)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건달이자 전 국회의원으로 일생을 보내고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아들이다 김좌진은 일제 감정기의 군인이였고 독립운동가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김좌진

 

1930년 1월 24일, 41살의 젊은 나이에 피살되었는데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외일보 기사에 의하면 김일성이 단독으로 암살을 실행한것으로 나온다 또한 연변에서는 암살범이 김동식(가명)이라는 설도 나왔다

 

김두한



경성부 종로에서 김좌진의 서자로 태어난 김두한은 경기도 개성에서 살았다 초기 야인시대 드라마에서 나온것처럼 외삼촌은 매일 도박을 하고 매일 술을 마시다가 집과 땅을 팔고 심지어 조카 김두한까지 노예로 팔고 도망갔었다

1930년,13세 때 혼자 경성부에 도망왔으나 외삼촌 때문에 일본 경찰들에게 쫓기다가 수표교 거지들에게 잡혀 정진영과친형제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원씨 노인 원영기라는 사람이 데려가 공부는 시키지 않고 운동만 시켰다는 설이 있다

 

하야시

 

하야시와의 대립? 하야시의 본명은 선우영빈이다 조직폭력배이자 사업가였다 1909년 부산에 태어나 일본에 가서 주오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우익의 겐요샤 결사단체에 들어가 사무라이가 되었고 1920년대경 일본의 주먹세계를 점령했다

 

이후 조선으로 건너와 명동에서 야쿠자로 활동하다가 1930년대 김두한과 대립하게 되지만 어쩌다가 친분을 맺고 서로 도움을 주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혼자 일본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고향 평양으로 올라가지만 남북분단이 되어 월남하였다 그리고 한국 정쟁이 발발하였고 부산으로 내려가 한 회사에 고위직으로 임명되어 회사를 운영하다가 서울에 올라가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1978년 사망했다

 

우미관 식구들

 

이후 원씨 노인이 죽자 1935년 나이 18세에 1:1 대결에서 신마적과 구마적을 이기고 서울에서 가장 큰 우미관을 제패 하게 된다

 

신마적

 

신마적의 본명은 엄동욱이다 매일 술을 먹으며 여기저기 행패를 부렸던 이유는 성전문학교-동경대 출신 초엘리트였는데 조선인 차별로 인해 출세길이 막혀서 비뚤어졌다고 한다

 

구마적

 

구마적은 창씨개명한 이름은 타카야마 이사오(高山勲)이며 고시형으로 알려져 있다 우미관의 우두머리가 되기전 구마적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했다는 설이 있다 힘이 많이 세서 마적이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구마적은 잘 아는 김동회의 회고에 의하면 택시의 뒷채 부분을 들쳐올리거나 차돌을 빼개고 동전을 휘어버리는 등 일반사람들에 비해 괴력을 구사했다고 한다

 

이 구마적과 대등하게 겨눌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신마적뿐이였다고 한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나온것처럼 구마적이 나이가 더 많았고 주먹패의 예우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마적이 우미관에서 물러나게된 이유는  10세 아래인 김두한한테 호되게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김두한의 부하들을 구타하는 등 횡포가 심해 김두한은 공터로 구마적을 불러내 두 차례 발길질만으로 제압 했다 김두한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구마적은 종로를 떠났다고 한다

김두한 어렸을때부터 종로와 파고다공원 근방에서 싸움 실력이 소문나 있었다 이후 종각의 한 술집에서 일본헌병장교들을 때려눕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던 레슬링 선수 황병관을 구해주기도 했다

 

왼쪽 김무옥

 

김무옥은 김두한의 오른팔로 활동했었다 유도 5단으로 실제로 김두한과 쌍벽을 이루는 싸움 실력을 가졌다고 한다

 

문영철

 

문영철은 실제로 키가 188cm며 복싱을 배웠다 역시나 김두한을 따르던 싸움꾼이였다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으로 꼽히는 태평양 전쟁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김두한은 강제 징용을 요구 받게 된다 그대로 끌려가게 되면은 자신과 부하들 모두 죽는다는 생각에 조선 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이라는 청년단체를 만들어 재직하면서 노동을 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김두한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가 용산의 일본군 무기고를 점령하여 활약했다 이후 미군에 의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가 되고 김두한과 정진영은 조선 공산당 조선청년전위대에 가입하게 된다

 

김두한을 눈여겨본 김일성은 인민군 남조선 사령관(소장)으로 임명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김두한은 조선청년전위대를 탈퇴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박용직이 부친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서 알려주게 되었는데 조선공산당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이래저래 고민을 하던 김두한은 이범석, 신익희 등의 설득으로 염동진의 백의사에서 비공식적으로 활동 하였다

1946년,김구, 이승만, 김규식, 유진산으로 조직된 대한민청이 만들어졌고 김두한은 별동대 총대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 결과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미수, 국군준비대 습격, 심영과 신불출 슴격, 친일파의 돈 압수, 조선공산당의 총파업을 막았다

1947년 대한민청에서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인 정진영을 살해하자 미군정은 김두한을 살인죄로 체포하게 된다

사형 선고를 받은 김두한을 구하고자 지청천, 이범석 등은 구명운동을 벌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어 김두한 사건은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검찰로 이관되어 석방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6.25전쟁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김두한은 학도병을 이끌고 나가동강 전투에 크게 활약을 했었다 이에 이승만이 김두한에게 내무부장관과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제의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1954년 5월 20일, 김두한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어쩌다가 자유당에 입당하게 되었지만 이승만과 이기붕과는 정치노선을 달리 했다

 

이정재

 

1954년 7월 16일,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켰고 개헌 반대 투표를 던진 의원은 자유당에서 제명 조취되었다 이후 김두한은 무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 정부에 대해 비판하였고 장견근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여기서 이정재에게 총으로 협박당했으나 되려 큰소리로 호통쳤다고 한다

1966년 9월 22일 말년에 김두한은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못 마땅했던 국회에 오물 투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심하게 구타를 당하게 된다 이후 석방된 김두한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게 된다

 

이후 1972년 11월 19일, 후계자 조일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중 길가에 쓰러진 김두한을 발견하게 된다 1972년 11월 21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향년 54세 나이로 오랜지병이였던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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